허선희

허선희

07/30/21
열한살의 여름, 먹성이 좋은 나이였지만 그날은 밥을 미뤄두고 바다로 나갔다. 남동생과 나 사이에서 어머니의 평등하지 않은 태도에 마음이 ...

열한살의 여름, 먹성이 좋은 나이였지만 그날은 밥을 미뤄두고 바다로 나갔다. 남동생과 나 사이에서 어머니의 평등하지 않은 태도에 마음이 자꾸만 상했고 동네 어른들의 농이 사실은 진짜가 아닐까라는 고민에 다다랐다.
야야, 니는 이집 아가 아닌가보다. 니만 얼굴이 다르네. 저기 다리 밑에서 주워왔나.
나는 다리 밑에 누가 버리고 간 애기였나,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닌가, 아버지는 왜 아무말 하지 않는가, 할머니는 내가 불쌍해서 잘해줬나 별별 생각을 다하며 훌쩍훌쩍 울었다. 11살 작은 머리로 생각을 이어가다 돈오점수! 순간 깨달아버렸다. 아, 나는 이집 셋째딸이구나. 가서 밥먹자. 나의 깨달음은 이러하다.
애를 주워오면 아들을 데려왔을 것이다. 장손의 집안에 굳이 딸을 업둥이로 데려올 이유는 없지, 빼박 엄마 아빠의 자식이구나.
그뒤로 나는 이집구석의 가부장과 싸우기 시작했다. 제사에서 선심쓰듯 절하라고 하면 내가 거절하고, 동생과 차별하면 악다구니 쓰고, 남동생보다 내가 잘 났음을 증명(안타깝게도 너무 어렸기에)하려고 애썼다. 세계의 시스템에 빨리 눈뜨게 된 것은 가부장의 모순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경쟁, 시험을 거쳐서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 사회, 수직과 경쟁 성공신화. 철학이 부재한 기술, 나아가 종차별의 생태 파괴까지.
나를 다른 삶과 다른 존재, 소수성과 더 작은 것들을 보려는 태도, 질문과 의문을 품으며 살아가게 만든 첫번째 갈림길에 등장한 이슈가 성차별이었다.
그 뒤로 명쾌하게 해결된 적 없는 고전적이면서도 현재에 펄펄 살아있는 페미니즘은 어떤 영역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생생한 주제이며 물러서지 않는 데드라인이다. 운동의 이슈도 아니고 문화예술의 탐색의 대상이나 주제, 소재도 아니다. 삶의 이슈 그자체이다.
문화예술 기획을 하면서 특별하게 젠더와 페미니즘을 주제로 작업한 적은 단한번도 없다. 아이디어의 발생과 진행하는 과정, 정리하는 모든 영역에 그냥 묻어나는 베이스 같은 것, 동양화의 바림 같은 것. 그러니 더 나이들고 할머니가 되어서 죽는 날까지 아마 다 풀지 못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예술과 인간의 삶, 문화로 드러나는 것들 많은 현재 진행형의 숙제와 이슈들이 있지만 가장 밑바닥에 있는,내 삶의 모순을 첫 인식하게 만든 성차별 이슈와 페미니스트로서의 각성이 있다. 몰랐으면 조금 더 편하게 살지 않았을까, 더 맘 편한 아이의 삶을 몇년이라도 더 지내지 않았을까. 11살에 아이의 평화는 끝났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허선희

07/24/21
? 오롯이 나의 방이 있는가.. 질문을 보자마자 어릴 때 호랑이 담요를 나란히 덮고 자는...

? 오롯이 나의 방이 있는가..

질문을 보자마자 어릴 때 호랑이 담요를 나란히 덮고 자는 세자매가 떠올랐다.
시골집 연탄 보일러 아궁이의 연기 냄새가 살짝 나고, 아래목은 지글지글 뜨거운 옛 우리집의 우리방.
여자 아이 셋이 한방에서 지내니 무섭지는 않지만 내 공간이 없어서 속상했다.
종종 마루 밑에 담배 상자를 넣어서 내 공간을 만들고 뒷뜰 창고의 항아리 안에 있기도 했다. 집에서는 더이상 만들지 못하는 나의 공간을 찾아 산으로 가서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무덤 주변에 심은 소나무 위를 기어올라갔다. 바닷가에도 큰 돌을 표시해놨다. 내 자리라고.

내 할머니, 내 아버지, 내 엄마, 내 공간, 내 책상, 내 책, 내..내...내...
가족이 많은 집에서 자라서 '나'만의 것이 갈급한 소녀는 드디어 고등학교에 가서 혼자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3학년이 되어서야. 대학을 가서도 처음 몇년은 부족한 돈을 충당하느라 친구들과 방을 같이 썼고, 서울에 올라와서 선배네 방에 기생했다.

처음으로 오로지 나의 방으로 혼자 이사간 날.
묘한 침묵과 고요와 대화할 사람이 없는 순간과 햇살이 들어오고 기우는 모든 순간이 오로지 나의 것이었다. 옥탑방, 덥고 춥고 가난했으나 내 방이라는 이유 하나로 너무 기뻤던 순간이었다.청춘은 옥탑방과 지하를 오고가다 방이 아니라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나는 이제 친구들과 집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자본이라곤 땡전 한푼 없지만 없는 사람들의 없는 돈을 모아 집을 짓겠다고 노력중이다. 영원히 집과 방이 내 것이 아닌 곳을 멤돌다 죽을 줄 알았는데 고양이도 곁에 있고 집도 원하는 컬러와 원하는 문짝을 붙여 만들게 되었다.

온전히 나의 방과 나의 집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대로 말한다. 사회인의 가면을 쓰고 웃고 일도 하고 관계를 맺지만 웅크린 담배 상자에 몸을 집어 넣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던 겁많은 사람이 큰 숨을 쉬면서 쉰다. 타인을 위해 노력하지 않지 웃지 않아도 되고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혼자 움직이고 혼자 누워있고 고양이 궁둥이나 두드려주고. 누구를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숨을 쉬는 공간이 나의 방이고 나의 집이다.

허선희

07/09/21
(고양이자매 아띠와루카, 그리고 더이상 내것이 아닌 쇼파.jpg) ...

고등학교 입학 이후로 태어난 집과 동네를 떠나 부유하는 삶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곁에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두지 않고 그때마다 집세를 나눠 낼 수 있는 가까운 친구와 산다던가 혹은 혼자 산다는 선택이 있었을 뿐. 서울에서의 이십년의 생활을 돌아보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짐을 덜어내는 과정이었다. 머지않아 탈서울 해서 자연 가까이 살아야지, 아니지 서울에서 밀려나게 될거야 라는 소망과 불안 사이를 오갔다. 요즘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사는 집을 고민하고 준비중이다. 이유는 나의 서울 생활의 질을 높이거나 조금 더 안정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내 곁의 있는 존재 때문이다.
7년 전 마음을 다잡아 먹고 구조한 고양이 자매 둘을 데리고 온 뒤로 다른 세계가 열렸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크기가 다르고 움직임이 다른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집을 채웠고, 동물영양학을 파고들고 행동학을 공부했다. 대신 고양이 자매는 나를 매 순간 관찰해서 나의 행동에 반응한다. 우리는 서로 인생과 묘생에 관해 각자의 종의 특성에 맞게 공부하고 있다. 고양이는 생태를 향한 나의 태도를 실천으로 이어가게 안내했고, 더 소수의 감수성을 키우고 있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그아이들에게는 지독히 사랑스럽지만 너무 커서 무서운 인간이다.
내가 집을 고민하는 이유는 이사를 하고 변화를 하는 과정이 아이들에겐 공포의 순간이기 때문에 더 많이 나이가 들기 전에 오랫동안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두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아이들 만큼 일년마다 나이가 들어가는 나를 위해서도.
어떤 존재가 나같은 고집쟁이의 삶을 단 몇년만에 뒤집어 놓을 수 있을까. 언어의 세계에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비언어, 몸으로, 눈빛과 에너지로 교감하는 동물은 오만하지 않게 세상을 만나게 하고 나와 다름을 수용하라는 대단한 스승이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을 받는 것이 어떤 거대한 화두이지만, 사랑을 받는 것 만큼 사랑을 하는 것이 비슷한 크기로 작용해야 결핍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균형을 잡고 사는 것. 깊은 사랑을 받고 살게 되니 좀 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인생이 둥글어지니 문제는 매사 뾰족함과 날칼로움이 특성인데, 무뎌지니 섬세하고 떨리는 감수성에 사라잡히는 회수가 줄어든다. 어쩔 수 없지,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것. 그런데 그 하나가 너무 좋아서 두어개를 잃어도 아쉽지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