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ahHong

홍은아

09/24/21
오늘의 소설 2020년 8월 29일 길에는 어젯밤의 여정을 아직 마치지 않은 이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나는 때로 아침의 비둘기 떼를 떠올린다. 새벽에 푹 저며진 이들의 행상에서...
EunahHong, today`s novel

오늘의 소설

2020년 8월 29일

길에는 어젯밤의 여정을 아직 마치지 않은 이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나는 때로 아침의 비둘기 떼를 떠올린다. 새벽에 푹 저며진 이들의 행상에서 비릿한 술 냄새를 맡는다. 사실 나는 술 문제가 있는 이웃을 만난 후부터 이들을 완전한 타인으로 느끼지 않는다. 밤, 낮, 아침 우리는 이웃의 취한 꿈을 엿보았다. 알코올이 주무르는 삶의 쳇바퀴는 지독히 위태롭고 외롭게 움직인다.

빵집을 들러 아침거리를 사갈까 하다, 어제 먹던 빵이 남아있는 것이 기억났다. 서둘러 몸을 움직여 지하철에 탄다. 죽이는 시간, 내지는 죽어버리는 시간. 타협할 수 없는 이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슬쩍 눈을 감고 오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혹은 이해할 수 없던 말들을 굳이 끄집어내어 취조한다. 왜 그 말은 이 말이 아니어야 했는가. 왜 그 말은 수행되어야만 했는가. 내가 내뱉은 말들과 내게 내뱉어진 말들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지름과 무게를 측정하고 순도를 감별한다. 후회나 모욕감, 혹은 자괴감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행하는 습관 같은 의식이다. 얼마 전에 어디에선가 상대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로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기 전에 감별하여서 하지 않는 훈련도 부진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의 달콤함에 종종 굴복하는 과거의 나를 반성해본다. 그렇더라도 사람은 한순간 바뀌지 못한다.

트람이 오려면 3분이나 남았다. 반복해 듣던 앨범은 이제 귀에 물린다. 끝없이 듣고 또 들어도 계속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있을까? 종일 한 앨범만을 들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음악이 선곡될 때까지 핸드폰을 붙잡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보통 라디오를 듣는다. 좋아하지 않는 곡이 나와도 이 곡이 반복 재생될 리가 없으니 마음 편히 들을 수 있다. 

어제 헹구지 않은 컵을 씻고 커피를 내린다. 작업을 바로 시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이해할 수 없는 미련들이 시작을 방해하는 것일까. 혹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내게 아직 추상적으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시작이 미뤄지는 것일까? 아침을 먹으며 간단하게 마음을 추슬러 봐야겠다.

요새는 드로잉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 섬세한 피부 아래 뼈와 근육, 핏줄, 지방 같은 것들이 흥미로운 조형물을 형성한다. 멜라닌과 빛이 만들어내는 음영을 가늠하며 서걱서걱 종이 표면 위 사람의 형태를 추적한다. 그림을 이루는 것은 그리는 대상의 존재 여부만이 아니다. 그리는 사람의 해석은 그리는 대상을 완전히 다른 맥락 속으로 끌어들인다. 대상은 조형적으로 새로운 맥락 속에 재구성되고, 그것의 사회적 의미도 재배치된다. 작은 종이 위 속의 조형적 세상은 서걱거리는 색연필 아래에서 피어오른다. 고개를 돌려 그리고 있던 캔버스 작업을 응시한다. 주섬주섬 안경을 닦아 쓰고 들여다본 그림은 갈 길이 구만리다. 풀지 못한 문제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정승처럼 바라보고 있다. 

나는 2000년 초중반부터 줄곧 유화에 매달려왔다. 매달린다는 말이 적합한 것은 나는 여전히 유화라는 재료를 완전히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다 자꾸만 허우적거린다. 조금만 더 가볍게 생각하고 그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음과 이성과 몸은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몇 발자국 앞서 나간다. 협의할 수 없는 간격에 절망감이 든다. 그래도 꾸역꾸역 앞으로 간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그림을 그리는 날이 부지기수이다. 

가끔 내 그림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도도 해보았다. 노트에 조형적 요소들을 나열하고 그림 그리는 과정을 간략하게 도면화하여 문제를 드러내면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 그림을 그릴 때는 문제가 해결되는 듯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그것은 하나의 가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아무런 기대 없이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방법이 오히려 바라는 상태로 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일지 모르겠다. 그간 쌓아온 경험과 인지가 오히려 내 그림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림이 제어가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만한 상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림이 나를 주도하여 몸을 움직인다. 혹은 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나일까.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을 한다. 내가 그리는 것이 그림인지 그림이 그리는 것이 나인지.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시작한 경우 주제와 조형적 언어 사이에 괴리를 많이 느꼈다. 그 둘의 교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작업 진행이 어려웠다기보다는, 조형적 언어가 주제를 담으려면 훨씬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나는 좀 서둘렀던 것 같다. 이 과정 안에서 효율성은 적용되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성공적인 결과를 위하는 과정은 욕망과 인내심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 하였다.

오늘 사용한 식기를 세척하고 집에 갈 채비를 한다.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길은 온통 들뜬 사람들로 가득하다. 단지 좋은 날씨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풍요로워질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