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여자

김송희

09/03/21
어젯밤에는 꿈도 없이 달게 잤어요. 자기 좋은 계절이에요. 잊을 수 없는 꿈이 몇가지 있는데, 어떤 마음이 갈무리 되면서 꿈을 꾸기도 해요. 그런 꿈을 꾸고 기록해두었던 걸...
꿈, 박태이, 박순덕, 아는여자

어젯밤에는 꿈도 없이 달게 잤어요. 자기 좋은 계절이에요.
잊을 수 없는 꿈이 몇가지 있는데, 어떤 마음이 갈무리 되면서 꿈을 꾸기도 해요.
그런 꿈을 꾸고 기록해두었던 걸 찾다가, 태이언니-순덕형님에 대한 꿈을 꾸었던 날의 일기를 찾았어요.

얼마 전 배미정작가-미정언니의 '아는 여자' 전시를 보고 책을 사서 읽으며 언니가 순덕형님과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순덕형님은 미술이 너무 하고 싶어서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다시 입시를 해서 미대에 왔다고 들었어요. 입학한 해에 형님이 30살이었을 거에요. 그런 열망과 용기가 신기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나요.

늦은 입학으로 동기였던 순덕형님과 나 그리고 복학한 선배였던 미정언니는 함께 학교를 다녔었어요. 졸업 후 대부분과 연락을 안하고 지냈기에 미정언니와도 서로 연락할 일은 없었으나 우연히 언니 작업을 보곤 했었어요. 근래 지인의 지인으로 SNS에서만 보다가 언니 전시 <아는 여자>를 찾아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한장의 그림과 그를 설명하는 문장 때문이었어요.

“반짝이고 있었던,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싶었다. 마음 깊은 곳에 박제된 빛을 가끔씩 꺼내 어두운 모퉁이에 다다를 때마다 그곳을 밝혀 본다.”

관련한 글을 모아서 만든 동명의 책도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아간 서점 겸 전시장에서 언니를 또 우연히, 드디어 만났어요. 예전과 어쩜 그리 똑같은지, 그간의 공백을 확 없애는 다정한 부산 말투와 개구장이처럼 활짝 웃는 얼굴이 반가웠어요. 그리고 각자의 일행을 신경쓰며 다급히 안부를 묻는 그 짧은 시간동안 왠지 불쑥 나와버린 순덕형님 이야기.
나는 아마도 형님을 기억하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걸까요. 미정언니는 형님과 가까웠다고, 책에도 그 이야기를 썼다고 했어요. 순간 먹먹함을 웃음으로 넘기며, 우리는 다시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졌어요.

집에 돌아와 첫 장을 읽으며 기분이 묘했어요. 내가 모르는 순덕형님의 마지막 날들이 적혀있었어요. 이제 이곳에 없는 사람이 돌고돌아 이렇게 우리를 다시 연결해주고 있어요.
미정언니의 말대로 순덕형님-태이언니는 우리 '마음 속 박제된 빛'이 되었어요.

꿈을 꾸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걸 잔뜩 먹고 밤 늦게 돌아왔는데 그 때문인가...

내내 화창한 날이었다. 어떤 공간에 대학 동기들이 모여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작년에 이쪽 세상을 떠난 동기 태이언니도 있었는데 학교다닐 때 언니랑 셋이서 같이 잘 어울렸던 혜진이랑도 인사를 나눈 다음 언니와 둘이 거리로 나왔다. 걸어가다 왠일인지 지금 같이 일하는 동료가 있길래 반갑게 인사하고 계속 걸었다.

태이언니, 아니... 언니의 옛 이름에 왠지 오빠 언니라는 호칭이 쑥스러워 형님이라고 붙여 불렀던, 더 익숙한 이름 - 순덕형님이랑, 아마도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화산동 집으로 넘어오던 길에 있던 옛 동네로 여겨지는 거리를 걸었다. 원래 낮은 집들만 있던 주택가인데 꿈 속에서는 연남동이나 망원동처럼 작은 까페나 가게가 많이 생겨나 있었다.
순덕형님과 같이 뭘 좀 먹자 했다. 나는 예쁜 브런치 까페 같은 곳을 가려했는데 순덕형님이 아주 아주 오래된 시장통 분식집 같은 곳으로 나를 끌었다. 천장까지 오랜 시간의 때가 켜켜이 앉은 그 곳은 처음 갔는데도 익숙하고 친근하고 그리운 느낌이었다. 해가 밝은, 아주 화창한 날 우리는 적당히 아늑할 정도로 어두운 그 분식집에 들어가서 메뉴를 보았다. 떡볶이와 김밥 등 생각보다 메뉴가 많았는데, 뭘 먹을까 하며 순덕형님이랑 희희덕거리며 메뉴판을 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아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꿈을 종종 꾸는데, 보통 꿈을 꾸면 꿈에 그이가 나왔더라고, 핑계김에 연락을 하곤 했었다. 전화기를 들었는데, 연락할 곳이 이제 없다. 가만 생각해보니 꿈 속이지만 순덕형님이 이제 세상에 없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형님과 만나 얘기하고 걷고 한게 더 기분이 좋았던 것도 같다. 꿈 속 풍경을 다시 생각해보니 햇볕이 환하고 여우비가 내렸던 것 같기도 한데, 날씨 좋은 날 치앙마이의 거리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역시나 기분이 좋다. 그래서 꿈에 잠깐 만났던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기분좋은 꿈을 꾸었는데 너도 나왔다고.

작년 이맘때였나 형님이 돌아갔다고, 발인이 고향인 제주라고, 실은 아픈지 오래였었다고, 1차로 치료하고 괜찮았다가 재발해서 고향에서 투병하다가 갔다고, 학교 마치고 대학원을 다니며 학교에서 일했는데 작업과 병행하면서 몸을 돌보지 못한거 같다고, 주변에서 몸 챙기라고 잔소리를 해도 혼자 살고 작업하다보니 그러지 못했다고... 모든 소식을 압축한 파일의 제목들처럼, 한꺼번에 뭉텅뭉텅 들었다.
동기들이랑 거의 연락을 안하고 지내니 전혀 몰랐다. 가끔 형님이 먼저 연락해서, 본인이 날 잘 챙겨야하는데 미안하다고, 언제 한번 보자고 하면, 늘 응응 그래요 그래요 만 했었다. 연락이 뜸해지고 한번은 갑자기 호두파이였나 쿠폰을 보냈길래, 이게 뭐에요? 하면서 고맙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먼저 연락해 조만간 꼭 보자 했는데, 늘 말 뿐이었다. 그러다가 형님이 떠났고 제주에서 발인을 한다고 전전날인가 소식을 들었지만 일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어쩌고 저쩌고 스스로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며 가지 못했다. 그렇게 놀랐고 슬펐고 그 다음은 묻었던가 잊었던가....

일요일. 종일 집에서 호두와 둘이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밥을 지어 먹고 천천히 청소를 하며 밖에서 들어오는 햇볕과 집 안에 고여있던 공기가 만나 시간이 흐르는대로 색이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해가 길어져 집안에 지는 볕이 가득할 때, 해야하는 일들을 잠시나마 다 잊고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만났다. 순간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사소한 장면들이 새삼 ‘기억’으로 만들어질 때, 사는게 참 별거 아닌데 싶다가도 살아있으니 이런걸 느낀다 싶었는데... 어쩌면 나는 오늘 내내 마음 뒷 편에 간밤에 꾼 꿈 생각을, 연락할 곳 없는 순덕 형님 생각을 접어두었나 보다.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폰에 저장해놓은 지난 메모들을 보며 작년 이맘때 쓴 글들을 보았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다고. 유난히 그 해 여름 아는 이들의 죽음이 많아 맘이 이상하다고 주변에 기대던 시절이었다. 그때 약해진 마음으로 쓴 글들 옆에, 어젯밤 이후 내내 접어두었던 순덕형님 꿈을 펼쳐서 나란히 놓아본다.
순덕형님이 가는 길을 못 봐서 마음에 남았던가. 그때, 발인일이 지난 후 오랜만에 혜진이와 만나 형님 얘기도 하고 근황 얘기도 하면서 이렇게 가끔 보자 했는데 그것도 꼬박 1년이 지났다. 시간은 빠르고 우리는 점점 더 죽음이 가까워지고 덕분에 삶을 더 깊게 느끼게도 되는 가보다. 오늘처럼. 형님이 이 세상에 있을 때에도 연락을 통 못하고 못 보고 살았어서 문득 문득 부재가 더 낯설다. 전화 저편에 있을줄 알았는데 없다는 것을, 애틋하게 잡고 있지도 않았으나 잘받아들이지도 무심해지지도 못했던 거다. 기분 좋은 꿈으로, 이제야 내가 순덕형님을 보냈나보다.

순덕형님. 거기서 잘지내고, 작업도 재밌게 하고 있나요? 다음에 만나면 우리 같이 맛난거 많이 먹어요. 또 와요.

2018.7.16. 0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