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선희
허선희 07/09/21 4:45 PM

고등학교 입학 이후로 태어난 집과 동네를 떠나 부유하는 삶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곁에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두지 않고 그때마다 집세를 나눠 낼 수 있는 가까운 친구와 산다던가 혹은 혼자 산다는 선택이 있었을 뿐. 서울에서의 이십년의 생활을 돌아보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자세와 짐을 덜어내는 과정이었다. 머지않아 탈서울 해서 자연 가까이 살아야지, 아니지 서울에서 밀려나게 될거야 라는 소망과 불안 사이를 오갔다. 요즘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사는 집을 고민하고 준비중이다. 이유는 나의 서울 생활의 질을 높이거나 조금 더 안정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내 곁의 있는 존재 때문이다.
7년 전 마음을 다잡아 먹고 구조한 고양이 자매 둘을 데리고 온 뒤로 다른 세계가 열렸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크기가 다르고 움직임이 다른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집을 채웠고, 동물영양학을 파고들고 행동학을 공부했다. 대신 고양이 자매는 나를 매 순간 관찰해서 나의 행동에 반응한다. 우리는 서로 인생과 묘생에 관해 각자의 종의 특성에 맞게 공부하고 있다. 고양이는 생태를 향한 나의 태도를 실천으로 이어가게 안내했고, 더 소수의 감수성을 키우고 있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그아이들에게는 지독히 사랑스럽지만 너무 커서 무서운 인간이다.
내가 집을 고민하는 이유는 이사를 하고 변화를 하는 과정이 아이들에겐 공포의 순간이기 때문에 더 많이 나이가 들기 전에 오랫동안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두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아이들 만큼 일년마다 나이가 들어가는 나를 위해서도.
어떤 존재가 나같은 고집쟁이의 삶을 단 몇년만에 뒤집어 놓을 수 있을까. 언어의 세계에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비언어, 몸으로, 눈빛과 에너지로 교감하는 동물은 오만하지 않게 세상을 만나게 하고 나와 다름을 수용하라는 대단한 스승이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을 받는 것이 어떤 거대한 화두이지만, 사랑을 받는 것 만큼 사랑을 하는 것이 비슷한 크기로 작용해야 결핍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균형을 잡고 사는 것. 깊은 사랑을 받고 살게 되니 좀 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인생이 둥글어지니 문제는 매사 뾰족함과 날칼로움이 특성인데, 무뎌지니 섬세하고 떨리는 감수성에 사라잡히는 회수가 줄어든다. 어쩔 수 없지,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것. 그런데 그 하나가 너무 좋아서 두어개를 잃어도 아쉽지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