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욱

최진욱

06/18/21
쓸데없는 짓? 나는 회의를 좋아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논쟁 과정을 짜릿하게 즐기는 것 같다. 정년을 앞두고 한 4년 정도 교수회의에 들어가지 ...

쓸데없는 짓?

나는 회의를 좋아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논쟁 과정을 짜릿하게 즐기는 것 같다. 정년을 앞두고 한 4년 정도 교수회의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데, 이유는 내가 가장 연장자이기 때문에 싸우는 맛이 없기도 하고, 또 흥분하면 혈관이나 심장에 안 좋을까 염려되어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장 나이 많은 자가 꽥꽥거리는 모습은 추하다. 회의를 하면서 논쟁을 즐기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다수결로 합시다’일 것이다. 그런데 회의가 한창 달아오를 때, 꼭 이렇게 외치는 자들이 있다.

미대학장을 맡았을 때, 학생들의 글쓰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글쓰기 과목을 교양에 따로 개설하려고 과목 이름을 교수회의에서 의논했었다. 나는 ‘비평적 글쓰기’가 좋다고 하고, 다른 교수들은 ‘창조적 글쓰기’로 하자고 해서 논쟁이 길어졌는데, 또 다수결로 정하자고 외치는 사람이 나왔다. 그래서 압도적 차이로 ‘창조적 글쓰기’가 과목명이 되었다. 나는 교수들이 회의장을 빠져나간 후, 허탈하게 앉아 있다가, 문자를 돌렸다. 창조적 글쓰기가 기존의 글쓰기라면 비평적 글쓰기는 작가의 글쓰기라는 취지로. 그리고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작가적 글쓰기는 곧 비평적 글쓰기이고, 좋은 작가는 누구나 글을 잘 쓴다. 이상할 정도로. 그런데 창조적 글쓰기(기존의 작문수업)에 시달려 본 미대생이라면 대체로 글쓰기에 자신 없어 한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일과 정확한 글쓰기는 맞닿아 있다. 미술을 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한 글은 잘 쓴 글이 된다. 드로잉 속에 세 사람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쯤 누워있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 장면이다. 한 학생이 작품 계획으로 가져온 드로잉을 보고, 그림의 구도가 보기 좋으냐(아름다움)의 문제보다 하고자 하는 얘기가 정확히 드러났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과 더불어-순간적으로-‘미술이란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림이야 잘 그릴 수도 있고(일러스트레이션, 만화), 아름답게 그릴 수도 있다(디자인, 공예). 그러나 그렇다고 미술이 되는 건 아니다. 말을 정확히 해야 미술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마지막 수업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20학번 학생들은 처음부터 비대면수업으로 만났는데, 역대 1학년 학생들이 강의평가에서 최하점수를 준 데 반해, 비대면수업 덕인지 높은 점수를 주었다. 이제 2학년이 된 그들이 선택과목인 ‘회화기법’을 많이 선택해줘서 거의 전원을 2학년 수업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몇 년 전엔 수강생이 적어서 폐강된 적도 있었던 과목이다.) 달걀로 그리는 ‘에그요크템페라’와 르네상스 이후, 인상파 이전의 ‘글레이징 유화기법’을 공부하는 과목인데, 무엇보다 정성이 필요한 수업이라, 학년마다 수업 분위기에 따라 결과물의 수준차가 큰 편인데, 이번 학년은 최상의 결과를 보여줬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수업이라니 얼마나 행운인가! 교수가 잘 가르치건 말건 학생들의 작품이 따라줘야 하기 때문에 미대교육의 성패는 전적으로 학생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자주 보는 장면이지만, 미대 졸업생들이 미술을 그만둔다고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동안 쓸데없는 짓 했다." 그러나 미술이란 원래부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짓이 아니라면 그것은 미술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쓸데없는 짓을 할 때 뿐이다.(인간이 동물과 달리 현재의 문명을 일굴 수 있었던 것도 ‘없는 것’에 대해 언어로 나타낼 줄 아는 능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가 될 수 있는 특권을 쉽게 내팽개치는 졸업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다. 작가가 되는 특권을 굳이 버릴 필요가 있나? 뭔가 인생에서 새 출발을 하려면 그렇게 양심선언을 하는 법이지만,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외침의 화살 절반은 미술을 향하고 있으니 양심선언도 아닌 셈이다. 미대를 선택한 자신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다. 미술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나 바로 쓸데없는 짓이기 때문에 매력이 있는 것이다.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론상으로는 알지만, 현실에서는 잘 체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미술이 아직 이렇다 할 ‘비평의 집’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술이 비평의 집을 가지고 있다면 작가를 그만두면서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나는 저 집에 들어갈 수 없어.’

비평의 집을 가지고 있지 않은 미술판에 오로지 통하는 것은 ‘명성’이다. 미술판에서 명성을 얻지 못하면 그 작가의 작품은 쓰레기가 된다.(쓸데없는 짓이 된다.) 그러나 이 말엔 어폐가 있다. 비평의 집이 없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 비평의 집이 있다면 비평적 가치에 따라 높건 낮건 비평의 집에 들어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쓰레기가 되지 않는다. 명성이 높은 스타작가만 살아남는 것으로, 대중들은-기자, 화랑주, 구매자들도 포함하여-미술판을 알고 있는데, 이것은 오해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비평의 집이 있다면 거의 모든 작가가 살아남는다. 비평의 집이 클수록 미술시장도 커진다. 최소한으로 쪼그라든 현재의 미술시장에서도 작가가 싸구려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는데도 살아남았다고 광광대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