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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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파고든 어둠이 너무 깊을 때, 우주를 홀로 떠도는 작은 통조림을 떠올리곤 했었다.
오랫동안 해온 일을 그만두고, 오랜만에 동종의 어둠에 싸여있었다.
어제 바닥에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조금 더 깊어지는.
말그대로 누워서 울던 그 시간동안에도 나는 이 시간이 언젠가 지나갈 거라는 걸 알았다.
기특하게도 이제는, 이 어둠이 지금 내게 필요한 시간이라는 걸 안다.
올라가려면 한동안 머물러야 한다는 것도.
때가 되면 스스로 힘껏 손을 뻗을 거라는 것도. -
어둠에 묻혀 사라질 것 같을 때는 더듬더듬 호두를 쓰다듬는다. 곁을 지켜주는 것들과 닿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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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듬어서 내어놓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일어나야지.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나 누워서 종일 이 생각만 했었다.
또 이렇게 지나가고 잊어버릴까봐 겨우 겨우- 스케치를 해두었다.
아마도, 바닥에 닿은 것 같다. -
하루에 쓸 20만원의 식재료비가 생긴다면 신선한 채소와 과일들을 가지고 간단하고 풍성하게 식탁을 차리겠다.
그리고 내게 용기와 영감을 주는 고마운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서로에게 힘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싱싱한 먹거리들이 품은 힘에 기대어 산다. -
결국에는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싹을 틔워내는 씨앗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 알의 작은 씨앗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 -
그 많은 생명들에 기대거나 빼앗는 ‘먹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래서, 살아있으니까.
내가 죽은 다음에는 땅과 미생물과 벌레와 식물과 동물들이 먹을게 남아있는채로 묻히고 싶다. 가는 길에라도 지구에, 땅에 뭐라도 보탬이 되는 쪽으로. 산이든 들이든 밭이든 마당이든 어디든. 나를 먹여준 것들에 나도 먹이가 되도록. -
마야 사람들에게는 ‘카스리말 kas-limaal’이라는 개념이 있었다고 한다. 그 뜻은 ‘서로 빚지는 것, 서로 생명을 주는 것’. 동물과 식물, 인간, 바람, 계절 등은 모두 서로의 열매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내가 커다란 자연의 ‘일부’, 생명 순환의 ‘순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막연하게 생각했던 죽음도 삶도 맑고 단순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
나는 다시 씨앗이 되었다. 중년이 되자마자.
싹을 틔우고 제법 자라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른 추위가 다가오면 재빨리 씨앗을 맺어 다음 생을 기약하는 식물들처럼, 크게 흔들리고 나니 다시 작은 씨앗이 되어 후두둑 떨어져버렸다.
그러니, 괜찮다. -
지금 내 곁에는 호두가 있다. 호두는 주로 잠을 잔다. 말을 걸면 조용히 나를 응시한다. 이 털복숭이 존재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아서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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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기 전에 수확해둔 레몬그라스와 애플민트, 페퍼민트, 레몬밤을 씻어 말려두었고, 차조기 잎은 씻어서 물기를 빼는 중이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내 텃밭에서 나는 것들로 식탁을 차려주고 싶다.
내 마음과 힘을 고스란히 담아. -
지금 오후 4시, 보슬비가 끊어질 듯 말듯 내리고 있다. 당장 문 밖을 나선다면 동네 천변을 걸어도 좋겠다. 혼자 계속 걸어도 좋고,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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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공동체는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들의 연결이 공동체라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면. 아주 느슨하고 덤덤한 그러나 끊어지지 않고 온기를 나누는 공동체로. 서로의 이상함이 양해가 되는 개인들끼리 만드는 이상한 작은 공동체들이 아주 많아지는 것. 우리는 결국 커다란 순환 안에서 서로의 일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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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사람이 타인이나 다른 존재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우리들이나 자연의 모든 것이 근원에 있어서 모두 하나의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밖에 달리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_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