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 아무것도 4월 가만히 미안해 일상 아이들 김송희
김송희 07/14/21 4:15 AM

잊지도 않았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_2014년 4월 16일 이후 매년 4월에 쓰는 일기, 혹은 편지.

2015.4.11

벌써 몇해 전 일인지 모르겠다.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지금의 내가 열여덟 혹은 열아홉의 나를 만나러 갔다. 어린 나는 교복을 입고 교실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꿈을 꾸는 지금의 내 목이 아팠다. 나는 어린 나를 토닥이며 다 괜찮아질 거라고 나는 앞으로 지금과 다른 세상에서 나의 삶을 살게 될거라고 얘기해줬다. 꿈을 깨고서 정말 그렇게 됐구나 싶어 조금 울었던 것 같다.

그랬다. 그때의 나는 괴로웠지만 그래서 더 꿈이 많았다. 친구들도 막연하지만 하고싶은게 많았다.
우리는 '스무살이 되면...'이라고 시작하는 말들이 점점 더 많아졌었고 자주 웃고 자주 울었다.

열여덟 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 수백명이 가라앉는 배 속에 '가만히 있었다.'

아이들은 스무살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미안해, 가만있지 않을게 했는데, 가만가만 벌써 1년이 지났다.
아프고 비틀거리더라도 봄은 꼬박꼬박 돌아오고 잊지 않고 꽃을 피우는구나.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 후 일본 '백만인의 어머니' 중 한 어머니는 '왜 이런 세상에 너를 낳았을까' 자책했다.
열여덟, 많던 적던 그보다 여러번 봄꽃을 보며 설렜던 우리는 2014년 4월, 수백명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을 만들었을까.

2020.4.15

00야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무엇부터 해야할지 조금 막막하네. 이파리 하나, 꽃 하나라고 해도 결국에는 그 모든 잎과 꽃이 그 가지들이 하나의 나무인 거잖아.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냥 지금 떠오르는 것들 한두 가지만 이야기해도 네가 알아들어주지 않을까, 믿어. 그 믿음에 기대서 써볼게.

늘 네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답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내 삶이 네 삶과 겹쳐질 때, 비껴나갈 때, 멀어지거나, 확 가깝게 느껴질 때... 그럴 때 내 모습을 보게 되면, 내가 지금 어디 있지? 뭘 하고 있지? 어떤 사람이 되었지?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볼 때면 문득, 네가 보낸 편지를 받는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늘 답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어.

코로나19라는, 일상을 흔드는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잃은지 몇 달이 지나고 있어. 일상이 멈추고 일이 멈춰진 그 빈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다가, 나는 계속 마음먹었으나 못했던 일 - 아주 오래된 편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어. 20여 년 전부터 모아둔 아주 오래된 종이쪼가리들이 큰 박스로 2개가 꽉 찰 정도로 많았거든. 꼬깃꼬깃 접힌 종이들을 하나하나 펴보다 보니, 애초에 다 버려야겠다는 계획이 무색하게 못버리겠는 것들이 더 많더라. 대부분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했는데, 한편으로는 앞뒤 안재고 내보인 그 순수한 마음들에 감동하기도 했어.

서로 삶의 큰 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전혀 기억이 안나는 그 어릴 적의 친구들. 우리의 10대는 의심없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용서하고 잊으며, 그렇게 서로 의지하고 안심하고 따뜻했더라. 쉬는 시간 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마다 서로 쪽지를 주고받고, 방학 때는 우표를 붙여 손편지를 주고받았던 때가, 우리에겐 있었지. 어제의 서운함이나 기쁨을 고스란히 담은 편지나 노트를 다음날 서로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었어. 때로는 내 일기같은 편지들도, 내가 뭐라고 써보냈길래 이런 답장을 보내왔을까 먹먹해지는 편지들도 있었어.

대부분은 부끄러울 정도로 내용 없고 유치한 그 많은 편지들의 끝에는 항상 ‘사랑해’ 라거나 ‘너의 영원한 친구’, ‘영원히 날 잊지마’라는 말들이 서슴없이 쓰여있더라. 그런 손글씨들을 보며 나는 마음이 확 뜨거워졌어. 그런 편지를, 그런 말들을 받으며 지금의 내가 조금이라도 좋은 면을 가지게 되었구나 싶어서 그런 말들을 아낌없이 써준 친구들에게 고마웠어. 그 아이들이 너무 예뻤어.

2014년 4월 16일 그때, 이미 어른이었던 우리는 각자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글자가 새겨진 것 같아. 가끔 내 속의 글자들이 달구어진 것처럼, 아프고 뜨거운 것이 올라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대부분이었던 10대 아이들의 ‘평범한’ 말들이, 그 일상에서 나왔을 말들이 내게는 새겨졌나봐. 아이들이 서로 나누었을 대화들, 그 계산 없는 ‘사랑해’ 나 ‘너의 친구’ 같은 말들 말이야.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그 말들이 서로를 지켜주고 어른으로 만들어주었을 텐데. 우리가 결국 나누지 못한 말들은 다 어디로 갈까.

시간이 많이 흘렀지. 친구들이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그 아이들이 걷고 말하는 나이가 되었어.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말을 나누는 일상이 위험해지면서 온 삶이 변하고 있는 요즈음, 나는 이제 막 자기의 말을 갖기 시작한 친구의 아이들을 보며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하게 돼. 책임감은 간절함에서 생기는 것 같아. 이런 무시무시한 일상이 이미 아이들의 어린 시절 기억이 되어버린 것에,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이 이보다 나을 것이라고 말 해줄 수 없음에 마음 깊이 변해야한다는 간절함이 생겨. 이 모든게 내 탓이라는 마음, 빙하가 녹고 온갖 생명들이 멸종되고 힘없는 자들이 속수무책 먼저 스러지고 전에 없던 질병이 끊임없이 생겨나더라도 조금이나마 그 속도를 늦추고 좋은 쪽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 아이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런 마음이 들게 해. 이런 생각이 들 때, 아이들이 새삼 너무 소중해.

나도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좀 더 얘기를 해볼게. 그래, 편지. 옛 편지들을 보니 작은 지역에 살았던 우리들에게도 1998년 IMF 외환위기는 일상이 흔들릴 정도로 큰 사건이었어.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못가고 여러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우리의 생활도 흔들렸지. 그런 일상들을 우리는 부지런히 편지로 나누며 서로 붙들어주었더라. 어른들이 무너지는 삶을 부여잡느라 미처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그때, 아이들끼리 그런 일상을 장난스레 나누며 오롯이 버티고 있었더라고. 새삼, 그런 기억이 크게 마음 속에 남았다는 걸 깨달았어.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를 나눠 듣고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같이 보고 떡볶이를 먹으며 만화책을 돌려 보면서도 우리의 마지막 10대는, 커다란 배에 탄 것처럼 IMF라는 사건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어.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지만 막연히 불안했던 그때 우리는 서로가 있다는 것에 분명히 안심하고 있었어. 하지만 돌이켜보니 아무 생각없이 서로가 전부였던 그때에도 이미, 우리는 어른이 된 이후의 삶에는 붙잡아야 하는 구명정 같은 게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어. 그게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를 태워줄 수는 없다는 걸 막연히 깨닫고 있었어. 그런게 나는 새삼 놀라웠어. 새삼 슬펐어. 아이들이 기억하는 세월호나 코로나 19는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만들까.

그냥, 내일이 4월 16일이잖아. 아이들을 생각했어. 아이였던 이들을 생각했어. 영화 ‘벌새’ 봤어? 우리의 10대는 그런 영화를 무수히 찍으며 살아왔더라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채로 지날 수 없는 일들을 아무것도 아닌 일상으로 살아오면서 우리는, 살아남았더라.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었고,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일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일상을, 똑같이 만들어왔더라.
나는, 뚜렷하게 삶의 모양을 바꾸고 방향을 돌리는 그 일상들을 우선 외면하는 태도부터 만들어왔더라. 삶이 무너졌는데도, 왜 무너졌는지보다 무너진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더 궁금해하고, 어떻게 삶을 다시 세울지 보다 행여나 거기에 내 것을 뺏길까봐 계산해보면서, 그런 일들이 일상이라고 덮으면서.
아... 이거였어.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구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이들에게, 나를 포함해서, 아이였던 이들에게. 아이에서 삶이 멈춰버린 이들에게. 너에게.
기억할게. 너를, 우리를, 나를. 기억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할게.
상처 받고 울면서도 서로를 놓지 않았던 그 어릴 적 편지들의 끝인사처럼,
“영원히 널 잊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