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자
김유자 02/03/23 2:30 AM

2021년 9월 26일
마음을 꾸미지 않고, 아니 고르지 못한 마음을 평평하게 만드는 대신 그것의 불균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을 갈구했다. 불균질/불순물에 집착하고 있다.

2021년 10월 6일
정연이 준, X-Ray에 노출된 필름으로 사진을 기록. 꿈 이야기를 짧은 글로 엮기? 진동.

2021년 10월 9일
흑백 사진. 소년의 얼굴. 문장들?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야 해.

2021년 10월 30일
최근 수업에서 배운 개념이 흥미로워서 지금 발전 단계인 작업을 설명할 때 차용할 작정이었는데—내 생각을 언어화하기 좋은 주제이기도 해서—근 몇 년간 예술계에서 자주 언급된 것이라 지양하는 편이 낫겠다고 정연이 말했다. 작업을 만들다 보면 왠지 흔한 생각 같기도, 이미 세상에 존재하거나 닳을 대로 닳아버린 의제 아닌가 싶기도 해서 곤란해진다. 완전히 새로운 주제가 어딨느냐 싶다가도 있는 것 같아서. 아니 새롭진 않아도 진부한 건 역시 피하길 바라니까. 가설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대신 파괴하고 균열을 다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한다면 더 솔직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을 얘기하다가 흔적도 없이 말로만 설명해야 하는 것들을 다루는 거지. 지금처럼. 세계를 확장하지도 구축하지도 말고 그 허술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야만 뭔가 가능하지 않나.

2021년 11월 3일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감각을 깨우치는 일이 전부라고 자주 생각해서, 믿음을 의심하고 파괴하고 균열을 응시하려 하는데 때때로 이것이 맞는가 조심스럽다.

2021년 11월 16일
“정체성과 욕망이 반드시 대립하는 제로섬 게임 구도로 취급하지 않을 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전혜은 선생님의 말씀.

2022년 1월 24일
내가 지닌 마음은 오류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가닿고 싶은 열망. 단언하지 않는 태도. 불순물. 졸업한 뒤 평소 내가 호기심을 가진 주제를 탐구했는데 모두 분명한 경계, ‘나’와 ‘너’ 사이를 단언하고 구분 짓는 자세를 주의하고 있었다. 다가갔다고 느낄 때 멀어지는 감각은 자칫 황망함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나는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 닿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도로 이어지길 바랐다.

2022년 2월 5일
Cusp는 시각적 차원에서 ‘본다’는 행위가 지닌 균열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의도적으로 틈을 가시화할 때 두드러지는 통제 불가능성을 긍정하는 작업.

2022년 2월 16일
기존의 언어로 현상을 설명할 수 없고 새로운 표현이 최선의 대안이 되리란 믿음을 갖지 못할 때, 이 모호한 마음은 어떻게 비겁의 얼굴을 띠지 않을 수 있나.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2022년 4월 5일
사고를 확장하고 고착화된 신념을 유연하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충돌은 어떻게 마주할 수 있지?

2022년 4월 22일
매체의 힘을 맹신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사고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 요구되는 자세는 무엇일까? 사진은 어떻게 기존의 감각을 탈피해 새로운 가치를 취득하게 되는가. 또는 망각의 영역으로 이동한 감각을 되살려 우리에게 고양감을 심어줄 수 있는가. 이번 제주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후자의 감각 전시장에서 가능케 하려면 무얼 놓치지 않아야 하나.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단언한 것들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내가 이해 가능한 언어로 부지런히 기록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조금은 덜 막막하겠지.

2022년 4월 30일
“실패의 감각을 예술로 드러낼 때 또 다른 가능성을 지닌다”는 철환의 말.

2022년 5월 25일
다른 속력으로 사진을 경험할 기회.

2022년 6월 2일
간송미술관 보화각의 마지막 모습을 관찰하며 느낀 점. 기능이 소멸됐으나 성격을 달리해 오래도록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을 이미지와 연결하여 되새김. 시간이 흐르고 기존의 의미를 탈피한 이미지는 어떤 과정을 거칠까.

2022년 6월 23일
이야기나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고 산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어떤 장력으로 나아가는 것.

2022년 7월 16일
밀리시필름 콜렉티브의 <미래 도전자들의 무수한 얼굴들> 봤다. 너무 많이 자서 봤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작년 DMZ에서 관람한 <런던 순환도로>만큼 자막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는 모습에 압도됐다.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는데 현재와 미래의 고민, 과거의 이미지를 시네마가 연결할 수 있다 믿고 시도하는 행위가 재밌었다. 조악한 CG는 웃겼고 3-4번 자다 깨길 반복했는데 잠결에 본 문장이 모두 좋았다. 고민을 쏟아낸 것 같았고 분절되는 장면 사이 힘을 잃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어떤 말을 더 강조하거나 힘을 덜어내려는 의도 없이, 악센트를 살리지 않는 말과 이미지를 연달아 보면 지금껏 익숙하게 받아들인 극의 형식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것을 익숙하다 여긴 일이 환상처럼 다가온다.

2022년 7월 28일
접착하지 않고 분리됨으로써 더 선명해지는 선택. 매번 하는 말이 달라 잘 모르겠다는 사람과 매번 다르기에 확신이 선다는 사람. 정말 모든 것이 취향 차이일까.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이 일리 있어 보인다. 사진 매체만을 고집하는 이들이 갖는 고민. 사진 매체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더 가볍게 접근해서 사진이 재밌어지는 지점. 이야기 없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이미지 콜라주. 배경일 뿐인 이미지. 그 이미지는 상상력을 요하는가?

2022년 9월 18일
ORB 회의 내용.
못 보고 안 본 것을 보았다 말하는 일이 왜 발생했나?
그럼 이들은 무얼 본 걸까?
실체 없이 감각만으로 남아 있는 현상을 무어라 부를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착각으로나마 ‘보았다’는 행위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