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원
최장원 07/15/21 2:40 AM

〈움직여야 불이 켜지는 조명등처럼〉

출판사 편집자님과 첫 번째 미팅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 무지개 마스크를 썼다. 편집자님은 ‘마스크 제작하신 거예요?’ 하고 물어보셨다. 나는 그냥 구입한 거라고 답했다.
미팅을 끝내고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남자친구의 차에 탔다. 나는 조수석에 앉았고 안전벨트를 멨다. 남자친구는 “오늘 무지개 마스크 썼네?”라고 했다. 그는 “멀리서도 게이인 거 알겠다~”라고 말했다. 그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나는 다음에는 까만색 마스크를 쓰겠다고 했다.

나는 그와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그의 집으로 갔다. 주차장에서 우리 둘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우리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의 집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집이 있는 층에 있는 이웃집은 현관문 바깥에 십자가를 붙여 놓았다.

그와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려 하는데, 그가 뜯지 않은 하얀색 마스크 한 뭉치를 주려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그는 이게 귀가 안 아프고 편하다고 했다. 나는 작업실에 이미 빨아서 여러 번 쓸 수 있는 까만색 마스크가 있다고 괜찮다고 했다. 그는 한 번 더 권했다. 나는 그러면 한 개만 달라고 해서 지금 쓰고 가겠다고 했다.

그의 집 밖으로 나가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복도의 감지등이 잠깐 켜졌다가 꺼졌다. 다시 그 조명등이 켜지게 하려면 나는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그는 뭔가를 챙기느라고 나보다 조금 늦게 복도로 나와서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나는 알았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나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게이인 것을, HIV감염인인 것을 드러내고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도 내가 조금 가라앉은 기분인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나는 오픈되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잃을 것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면 항상 조금 더 오래 씹어보게 된다.

차 안에서 그에게 내가 곤약을 먹었던 일을 얘기했다. ‘내가 체중을 감량해 보고 싶어서 곤약을 먹었던 적이 있었어. 곤약은 저칼로리라서 좀 많이 먹어도 되는 줄 알고 많이 먹었는데, 곤약은 원래 소화가 잘 안 되는 데다가. 그게 뱃속에서 계속 뿌는거야. 그래서 삼일동안 내내 계속 토하고 체한 상태여서 너무 힘들었어. 내가 소처럼 되새김질할 줄 안다면 훨씬 나았을텐데.’ 나는 조수석에서 왼손을, 그는 운전석에서 오른쪽을 내밀어 서로의 손을 잡았다. “나와 함께 가장 게이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그가 되물었다. “게이 같은 행동?” “아니, 서로의 음경을 핥잖아!” 그가 웃었다. 우리는 이것저것 이야기하다, 서울역 즈음에 다다랐다. 나는 느끼한 말투로 말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그가 대답했다. “해방촌으로. 그런데 왜 해방촌이지? 난 잘 몰라.” “어딘가를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 살 게 되었으니깐.”

그가 운전하는 차는 나의 작업실에 거의 다다랐다. 나의 작업실로 향하는 길은 좁고, 꼬불꼬불해서 차가 들어가기 어렵다. 그는 오거리에 나를 내려준다고 했다. 나는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가 클로짓게이인 것을 서운해할 수 없다. 나는 그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서 이야기했다. “이것 참! 무지개 혁명만이 답이다! 내가 청와대 꼭대기에 프라이드 깃발을 꽂을 것이야! 내가 어? 한탕 크게 해서 형한테 한 자리 줄게! 문체부장관 어때?” 그가 웃었다. 차는 오르막길을 다 올랐다. 오거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잠시 유리창이 썬팅 된 차를 세우고 마스크를 내려 뽀뽀를 하고 다음에 또 보자고 작별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