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Anti-Freeze에서 선보인 작업은 2014년에 그렸던 '산다는 것은 떠나는 것에 대한 연속(Living, Leaving)'을 2023년에 다시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언젠가 이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었다. 계속 게이 커뮤니티를 리서치 하면서 했던 작업은 나에게 게이를 위한 콘텐츠를 만든다는 효능감이 있었다. 그러나 드물게 커뮤니티로 부터 받은 피드백 중 '너가 뭘 알고 그런 작업을 하냐' 라는 말은 작업을 오독한데다가 나에게 해당이 되지도 않는 비판이라서 넘기면 되었지만, 이상하게 넘길 수 없었다. "내가 자아가 너무 컸구나, 하긴 내가 뭐라고 이런 작업을 할까." 그리고 내가 정말 게이를 내 편협한 시선대로 대상화 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퀴어라는 게 알게 모르는 대표성을 띄게 되기 때문에 내 말이 하나의 의견이라기 보다 무언가를 규정하고 오독하게 할 수 있겠다. 그런 흐름 사이에서 무얼 더 이상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온전히 내가 느끼고 그렸던 지점에 대해서 돌아봤다.
2014.02.03 00:38
산다는 것은 떠나는 것에 관한 연속 (LIVING, LEAVING)을 그리게 된 글
너에게 붙어있던 내 으깨진 머리
붙은 채로 아물어 딱지가 지고 너와 하나인 줄 믿었지만
너의 기름진 살이 분명히 가로막았지
고통스럽게 떼낸 나의 머리
떨어지는 것은 나 혼자 아팠던 것도 나 혼자
떨어지면서도 온 세포들이 비명을 질러 멍해진 그 틈을 타
너에게 기대했던
골수와 뇌세포가 너의 몸에 남아 있나
허전하고 멍한 어딘가 빈 기분
지금도 너에게 붙어있는 걸까
더 이상 네가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거리는 어떻게 두는 걸까
지금 내가 두는 게 거리가 맞는 걸까
어쨌든 너에게 나에게 다시 걸어올 수 있기를
이것도 나의 기대고 바램이고 욕심이지
철렁한 것은 무엇일까
머리를 떼내어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
너에게 남아 있을 내 세포
그것이 죽지 않는다면
분열해서 어떤 식으로 자랄까
너에게 남아 있을까
나는 분명히 못 알아볼 것이고
너는 알아볼까? 그게 너의 것이 아니란 것은 알까
나를 인지할까
인지해도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겠지만
2014년으로부터 9년이 지난 2023년에 내가 이 정념의 텍스트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낀 점이 있다. 상대를 갈구하지만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다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는 점이었다. 커뮤니티에서 작동되는, 성애를 하기 위한 신체의 기준이 명확히 존재하고 거기에 맞춰지는 게 더 중요한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커뮤니티에 들어 올 수 있는 환경이 되고, 공적인 연결이 된다면 아마 유효하지 않았을텐데. 저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본인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위험한 상황이거나, 그럴 수 없는 환경의 퀴어가 더 많고 익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를 더 궁금해 하지 않는다. 모두가 잠든 어두운 주택가 한 편에 잠시 일렁이는 불꽃이 생기고, 다시 캄캄한 골목을 혼자 걸어나가는 것의 반복. 오히려 이 글이 너무 무거울 정도로 지금 더 가벼운 관계의 반복 속에서 있다. 익명만이 반복되는 경험에서 정체성과 온갖 운동이 흐려진다. 성애와 퀴어? 그것이 동일선상에 있는지 의문이다.
사실은 커뮤니티 작업을 하면서 나를 배제한 채로 작업을 해왔던 것은 아닐까? 또한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작업했던 것은 나의 경험이 아닌 것을 그때 잠시 들여다보고 아는체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도 커뮤니티의 일원인데 왜 내가 절실하게 느끼고 오롯이 자신의 언어로 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2014년 그림에는 내가 느꼈던 감정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렇게 빙글빙글 돌아서 결국에는 다시, 이어지지 않았던 그리고 잇고 싶었던 이번 작업의 시리즈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