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타
리타 07/09/21 9:15 AM

언젠간 읽겠지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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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08)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당신이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책을 둘러싼 소문, 평가, 화제 등을 파악하고 있다면 이미 그 책을 아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우리가 대화 중에 편의를 위해 '지인'의 범위를 한정없이 넓게 설정하는 것처럼, 독서 경험 역시 그처럼 가벼운 것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이는 책을 읽지 말자거나 모든 책을 대충 읽자는 말이 아니다(아마도...). 그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독서 경험과 거기서 오는 고유한 즐거움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아주 진지한 연구와 토론을 위한 독서에서 오는 둔중한 통찰의 순간 만큼, 읽은 거라고는 제목과 책 날개의 저자 소개가 전부인 신간 소설을 신나게 까내리는 말초적 쾌감 역시, 어쨌든 '책'으로부터 파생된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이 책은 독자들을 독서 행위의 부담과 책임에서 해방시켜 책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더 말하게 하려는 듯하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 내에서 책에 대한 대화의 총량을 늘리려는 공리주의적 수작이랄까.

(여기서 잠깐. 그런데 애초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상황이 그다지도 응급하고 빈번하게 발생한단 말인가? 도대체 언제 그리고 누구에게???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이자 작가로서... 저자는 자기를 둘러싼 물적/인적 환경을 대단히 일반화하여 과장하고 있는 건 아닌가????)

결론적으로 나는 이런 발상에 동의한다. 우리는 읽지 않은 책을 다루는데 있어서 더 뻔뻔하고 용감해질 필요가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책을 다룰 때만 진정으로 뻔뻔스러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특권이다. 만일 내가 어떤 책을 오해한 채 부당하게 그를 비난하며 지난 30년을 보냈다고 해도, 그리고 내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 모든 오해들이 당시 나의 흐트러진 집중력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고 해도, 나는 그 책에 아무런 사과도 미안함도 없이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그 책을 꺼내 묵묵히 한 번 훑어 보는 것으로써 자그마치 30년치의 '견해'를 '수정'할 것이다. 이 같은 극한의 억울함을 겪는 것도 책 뿐이고, 그러고도 우리를 용서해주는 것도 책 뿐이다. 그러니까...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금부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일명 '언젠가 읽겠지' 리스트.

아래 열거된 책들은 나의 교보문고 장바구니에 아주 오랫동안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러 이유로 제대로 들춰진 적이 없다. 또 계속해서 놀라운 신간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그들보다 먼저 선택받을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갑자기 하늘에서 오천 만원 정도가 떨어지면 구매할 수도 있겠지만 천 만원이 떨어진다면 이들이 아닌 다른 책을 사겠다. 과연 이들과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쨌든, 장바구니의 맨 밑 바닥에서부터 시작해보자.

1)<이질성의 철학>, 줄리언 페파니스 지음, 백준걸 옮김, 시각과언어, 2000.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을 때만 해도 절판이 아니었는데 이제 절판이 되었다. 새삼 장바구니를 보니 많은 책들이 품/절판이라고 뜬다. 그 중 절반 정도는 절판 되기 전에 이미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매했고, 나머지는 구경할 새도 없이 절판된지라 그저 입맛을 다시고 있다. 출판 업계에서 일하는 지인의 말에 의하면 "절판시키기<-걍 원해서절판시키는게아니라, 계약기간동안 1쇄도 못팔아서 ㅠ 계약기간 끝나고 걍 재계약 안하는거일듯요.. 그니까 ㄹㅇ본전도못건진거죠 개적자"라고 한다. 나는 출판계의 현실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확실히 바타유, 보드리야르, 리오타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궁금해 할 사람이 1000명을 넘을 것 같지는 않다. 이 날 이 시점, 전 세계를 통틀어서 말이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해도 나는 어쩐지 이런 사실에 일일히 분개하곤 했지만, 이제는 그저 납득할 수 없는 종류의 책들(주로 자기계발서)을 피해 다니는 것 만으로도 할 일을 다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튼 이 책을 왜 읽으려고 했더라????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2)<도둑맞은 손>, 장-피에르 보 지음, 김현경 옮김, 이음, 2019년

어느 날 교보문고 합정점에서 선 채로 이 책을 반 쯤 읽었는데, 어쩐지 그 날 따라 '지금 집에 있는 아직 포장도 안 뜯은 책들'을 떠올리며 겸손해지는 바람에 그것이 구매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이 책을 구매할 일은 없었다. 당시에 나는 이 책을 무척 즐겁게 읽었고, 심지어는 임솔아의 단편인 <신체 적출물>(이 단편은 현재 <눈과 사람과 눈사람>(문학동네, 2019)에서 읽을 수 있다)과 엮어 뭔가 써보려고 했던 것도 같다. 누구에게든 선뜻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인 에너지와 섬세한 논박들로 가득찬 책이다. 생명정치와 주권에 관련해서도 유용한 통찰을 얻어낼 수 있고, '신체 일부의 분실'이라는 단순히 흥미로운 사고 실험의 전개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다. 이렇듯 소장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당분간 이 책이 필요하진 않을 것 같다. 때때로 이런 결정은 번복하기 어렵다. 안타까운 일이다.

3)<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지음,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년

이 책이 발간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손을 꼽아가며 기다렸다. 나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을 세 권 소장하고 있었는데, 출간 순서대로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문턱 너머 저편>,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이다. 다들 알다시피(알죠?) 그녀는 시인이고, 운동가이고, 페미니스트로, 특히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라는 논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논문의 번역은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 2019)와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그녀의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1973)라는 시를 자주 인용한다. "이것은 압제자의 언어다. 하지만 당신과 말하려면 난 그게 필요해". 이 인용으로 에이드리언 리치를 처음 알게해준 책은 아마도 일레인 쇼왈터가 편집한 <페미니스트 비평과 여성 문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4)인데, 다른 책일수도 있다. 그 시기에 읽었던 모든 책들은 내 머릿 속에서 난잡하고 음란하게 뒤얽혀 있는데, 딱히 정돈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공통 언어'에 대한 에이드리언 리치의 따뜻한, 그야말로 (마사 누스바움 식으로) 자애로운 인터뷰도 읽은 기억이 난다. 삐딱하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대체 '모성'의 경험이라는게 뭐길래 '압제자'와 '강제적 이성애'를 말하던 그 날선 시인을 이렇게 온화하고 부드럽게 만드나??? 어쨌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럼 나는 왜 이 책을 사지 않았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두 번을 샀고 두 번 다 아끼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언젠간 내 몫을 사겠지, 하고 약 1년 가까이가 지난 것이다.

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현대문학, 2018년

이걸 왜 아직 읽지 못했는지, 나 자신도 의문스럽다. 그야 추천사가 워낙 화려해서 출간 직후부터 기대했고, 지인들이 때로 이 책의 내용을 찍어 올릴 때마다 '무슨 책이냐, 너무 재밌겠다'며 잔뜩 군침을 흘리며 질문 했으며, 심지어 E-BOOK이 있다는 걸 알고 결제 직전까지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안 읽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심리적인 이유가 있는데, 우선 너무 두꺼워서 두려웠다. 나는 이제 이런 두께에 대한 인내심이 거의 바닥났다. 심지어 작가가 미국 보스톤 출신의 '영문학자'다. 이런 두께로 '모스크바' 운운하며 책을 내는 사람은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이거나 최소한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 작가는 졸업 후 20년 간 금융업에 종사하다가, <우아한 연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전업 작가의 길에 올라, 마침내 프랑스의 '피츠제롤드 상'(아마 제목을 보고 뽑는 것 같다)를 수상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쓰는 글을 믿을 수 있을까? 물론 이 책은 틀림없이 재밌는 소설일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동안 이런 나 자신의 말없는 저항감과 계속 싸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5)<고어 자본주의>, 사야크 발렌시아 지음, 최이슬기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1년

오늘 있었던 일이다. 한참을 G-03(사회문제) 코너에서 머뭇거렸다. 분명 이 책을 사러 서점에 들렀는데도 막상 계산대까지 동행하지는 못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 자본주의> 같은 제목의 책을 '소장'하는 행위 자체에 안주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일종의 또 다른('새로운') 상품으로 떠오르는, 무용하고도 교묘한 악순환에 가담하고 있다는 자기인식 때문일 것이다. 물론 쓸데없고 소모적인 생각이다. 머뭇거리면서도 저자의 이력과 해외에서의 평가, 이 책이 다루는 소재에 대해 구글링했다. 아담한 사이즈의 책인데 표지는 일러스트 부분이 양각으로 처리되어 아주 예뻤다. 나는 결국 이 책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날은 멕시코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폭력과 조직적 살인이 어떻게 자본주의와 '악랄하고 촘촘하게' 공모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모르고만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나대로 해결해야 하는 '지금 여기'의 문제가 있다고 누군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변명한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지금 당장 우리가 다 같이 뭔가를 읽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